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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언어는 무신경하면서 동시에 섬세하다.
대충 빚어서 응달에서 말린 찰흙 부조가 묘하게 나의 얼굴을 닮은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단어를 가지고 누구라도 손가락을 튕길 만 한 문장을 지어낸다.
박민규의 언어는 또한 태연한 듯 잔인하다. 지하철에 사람들을 짐짝처럼 쑤셔 넣어야 하는
푸시맨의 일과는 ‘상습적’ 이 되어 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업에 가까워지고,
승일의 손에 밀려 탄 우리는 신도림역 1호선 8번 칸에서
내 아버지의 ‘상습적으로’ 내려앉은 어깨와 비뚤어진 넥타이를 목도하게 된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IMF 즈음의 퍽퍽한 한국 사회를
불우한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눈으로 바라본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이다.
2005년에 출판된 단편집 『카스테라』에 수록된 이 단편은 박민규가 과거 여러 장편에서
보여주었던 사회비판적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카스테라』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자본주의 시대의 문제점들이 팽배해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여러 세태들을 꼬집고 있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코리언 스텐더즈』, 『갑을고시원 체류기』,
그리고 바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이 많은 작품들 중 특히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이 작품이 바로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지만, 승일의 산수는 남들보다 조금 빨리 시작됐다.
할머니가 병으로 입원을 하고, 아버지는 변변치 않은 직장에 다니는 승일은
어린 나이에 사회로 뛰어든다.
여름방학동안에 밤에는 편의점에서, 오후에는 주유소에서 일하던 승일은
코치 형의 소개로 신도림 역의 푸시맨이 되었다.
소설에서 지하철의 푸시맨들은 마치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기둥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지하철은 견고하게 구축된 자본의 벽돌로 쌓아올려진 노동과
비인간화의 시스템으로 향하는 컨베이어 벨트이며,
푸시맨은 혹시나 그 시스템에서 낙오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국가경제의 중추, 일당백의 요원들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등장인물 중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기절을 해도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야 하며,
척 보기에도 가슴 같은 곳을 짓눌리더라도 출근은 해야 한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을 가지려면 어릴 때부터 수학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구제금융 시대에 직장에서 자리를 보전하려면 정시출근은 필수다.
야근은? 시켜주시기만 하면 뭔 들 못하겠습니까.
시스템을 탈출한 사람은 단 한사람이다.
바로 승일의 아버지만이 시스템의 바깥으로 나갔다가, 기린이 되어 돌아왔다.
왜 하필 기린이 되었는지를 물으면 정확한 답을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동물원에 가서 기린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굳이 기린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린은 별다른 일 없이 우리 안을 느릿느릿 거닐면서 높은 곳의 풀을 씹어 먹지만
항상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슬픈 눈으로 피로한 얼굴을 보여준다.
무슨 무슨 상사에서 시급 3천5백 원의 산수를 하던 승일의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신의 산수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산수 앞에서는 병든 아내도,
매일을 아르바이트로 보내는 아들의 존재도 무의미하다.
아버지는 피곤한 기린이 되어 자신만의 산수를 끝낸 것이다.
우리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과연 나의 산수, 또는 수학은 무엇이며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IMF가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지금,
우리는 아버지들과 비슷한 산수를 하며
살아가야 할 날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지독히도 산수를 잘 하는 이들은 튼튼한 금고 안에
잘 정리된 인생의 회계장부를 한 권씩 쌓아놓게 될 것이고,
영 감각이 없는 이들은 가계부 수준의 종이뭉치를 가지고도 쩔쩔매는 인생을 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산수가 되었든 산수 그 자체가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산수를 못한다고 인생에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하다 하다 안되면, 세상을 내려다보며 걷는 기린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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